구름 고래

유서 ; 어느 날 내 죽음을 감당할 당신에게 본문

고래의 수필

유서 ; 어느 날 내 죽음을 감당할 당신에게

Loel the writer 2019. 8. 22. 03:08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혔습니다.

내 곁에 그 무엇도 둘 여유가 없어 내치고 또 밀었습니다.

그래서 못난 나는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마저 상처 입혔을지도 모릅니다.

모진 말들만 내뱉어 미안합니다.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사랑하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미안합니다.

이름 부르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겨울에 내리는 눈, 그 사이에 숨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겨울에 이 세상을 떠났으면 합니다.

세상은 춥지만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은 따듯했으면 합니다.

나라는 사람을 떠올릴 때 좋은 기억만 떠올랐으면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한다고 말 한 번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도 꼴에 남자라고 낯부끄러운 소리 한 번 못해 미안합니다.

내게 주신 분에 넘치는 사랑, 절반도 되갚지 못하고 떠나 미안합니다.

내 모든 나날들이 당신들로 인해 아름다웠음을 이제야 깨달아 미안합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살 때도 내 지갑의 사정을 먼저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애써 만든 반찬, 언제나 먹지 않고 집을 나와 미안합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디 가서 "우리 아들이 이렇지" 자랑 한 번 할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의욕만 앞섰지 실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도망치고 싶었을 때 버팀막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떠오른다면 그 자리에 추억과 함께 묻어주세요.

이 편지를 읽는 누구든 나를 묻어주세요.

나는 이기적이라 나를 아는 누구에게도 잊히고 싶지 않습니다.

평생 나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고 또 좋았던 기억만 간직하게 두고 싶습니다.

내 잔향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큰 벽 앞에서 난 무엇도 아니겠지요.

점점 내가 흐릿해지고 멀어지겠지요.

 

마음 편히 툭툭 털고 일어서려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스치는 얼굴이 수백입니다.

떨군 눈물도 수백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남기고 싶은 당부가 수백입니다.

하지만 모두 접고 떠나겠습니다.

그 어떤 말보다 내 이별이 당신에게는 큰 아픔임을 알기에.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또 미안했습니다.